[1보] '북한에 핵기술 전수' 파키스탄 핵과학자 압둘 카디르 칸 별세
Abdul Qadeer K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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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의 금속공학자인 압둘 카디르 칸은 1998년 파키스탄 최초의 핵실험을 성공시켜 파키스탄을 이슬람 최초의 핵보유국으로 만들어 '파키스탄 핵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국민적 영웅으로 존경받아 온 인물(1936~ ). 이후 핵 핵심기술을 리비아ㆍ일본ㆍ북한 등 다수국가에 판 협의가 드러나며 가택연금을 당하기도 함.
1936년 4월 1일 인도 보팔에서 태어났으나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이 종교문제로 분리되자 무슬림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파키스탄으로 이주하였다. 카라치 대학을 졸업한 후 서독과 벨기에에서 유학했으며 1972년부터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물리동력학연구소(FDO)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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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DO는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된 핵 폭탄과 같은 수준의 농축우라늄을 이미 만들어내고 있던, 영국 네덜란드 독일 등이 공동 설립한 우라늄농축합동연구소(URENCO)와 정보교류가 활발하였다. 그는 이 연구소에서 핵무기를 만드는 데 필수적인 원심분리기 제조기술을 독일어에서 네덜란드어로 번역하는 일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핵심기술을 획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칸은 1976년 연구소에 사표를 내고 갑자기 파키스탄으로 귀국해 핵연구소 소장이 되었다. 네덜란드 당국은 그가 핵무기 제조기술을 훔쳐갔다고 판단해 소송을 제기했으며, 암스테르담 지방법원은 1983년 1월 궐석재판으로 그에게 4년형을 선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판결은 법적 절차상의 이유로 번복되었다.
그는 1976년 귀국 이후 '칸 연구소'를 설립해 파키스탄의 국가적 과제인 핵무기 개발에 전력을 쏟았다. 인도와의 마찰로 핵무기가 절실했던 파키스탄은 칸 연구소에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결국, 무기급 우라늄을 농축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1998년 5월 28일 사막에서 공개적인 핵폭발 실험에도 성공해 국민적 영웅으로 부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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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미국 등은 그에 대해 지속적인 감시를 폈으며, 이같은 압력으로 칸은 2001년 칸 연구소 소장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미국과 영국의 정보기관들은 칸 박사에 대한 조사를 계속했고, 2003년 11월 미국 등은 파키스탄 정부에 칸 박사가 리비아, 이란, 북한 등에 핵기술을 제공했다는 의혹을 제기하였다. 이에 파키스탄 정부로서도 조사에 착수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결국 칸 박사 일행이 1989년 이후 북한ㆍ리비아ㆍ이란 등 3개국 등에 우라늄농축기술과 원심분리기 도면ㆍ부품 등을 제공한 것을 밝혀냈다.
칸 박사도 2004년 2월 지난 15년간 북한, 리비아, 이란 등에 핵기술을 제공한 사실을 시인하였다. 이 과정에 국가 차원의 조직적 개입이 있었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았으나 파키스탄 정부는 칸 박사의 밀거래와 관련하여 그가 혐의를 인정함으로써 처벌 대신 가택연금하는 데 그쳤다. 2009년 가택연금은 해제됐지만 여전히 미국의 감시 등으로 현실적 제약을 받고 있는 그는 2012년 '파키스탄보호운동(TTP)'를 창당하고 2013년 총선을 겨냥해 정계진출을 선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