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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 노태우 전 대통령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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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 노태우 전 대통령 사망

대한민국의 제13대 대통령.

제4공화국 당시 전두환과 함께 군 내 불법 사조직인 하나회를 결성, 12.12 군사반란을 주도하였다. 전두환이 집권한 뒤에는 정치인으로 전향했다.

노태우vs 전두환 비교 공통점 차이점


"전 대통령의 성격은 일이 벌어지면 누구보다 먼저 뛰어나가는 스타일입니다. 그런데 열심히 뛰다 보면 기회도 많지만 자칫 남과 충돌할 수도 있고, 고립될 수도 있고, 쓰러질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렇게 쓰러지지 않도록 중심을 잡는 것이 내 역할이었다고 봅니다.

1999년 9월 월간조선에 실린 노태우 육성 회고록 내용

5.3.1. 공통점[편집]

경상도 출신: 전두환은 경상남도 합천군 태생이고 노태우는 대구광역시 태생이다. 물론 전두환은 태어나기만 합천에서 태어났고 실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곳은 대구이기에 둘 다 대구 출신으로 볼 수도 있다.

일제강점기(1930년대) 태생

6.25 참전

대구공업중학교 동문: 전두환은 24회 기계과이고 노태우는 22회 전기과이다. 다만, 노태우는 경북고등학교로 전학을 가서 그곳에서 졸업했다.

육군사관학교 11기 동기


장교양성교육기관 생활담당 교관. 전두환은 서울대학교 학군단 훈육장교, 노태우는 육군보병학교 구대장.

베트남 전쟁 파병부대 연대장

청와대 대통령경호실 차장보 - 전두환은 작전차장보, 노태우는 행정차장보. 이후 노태우도 작전차장보를 지냈다.

특전사 여단장 경험- 전두환은 1공수특전여단장, 노태우는 9공수특전여단장

제1군단 예하 사단장 - 전두환은 제1보병사단, 노태우는 제9보병사단

국군보안사령관

12.12 군사반란 주도

민주정의당 총재

대한민국 대통령

철창행과 사면

하나회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동 거주

둘 다 젊은 시절 운동 능력이 좋았다. 전두환은 원래 운동 선수(축구 골키퍼) 출신이며, 노태우 역시 생도 시절 체력장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며 '태릉 타잔'이라는 덕담을 들었다고. 전술한 대로 두 사람 다 특전사이므로 몸이 상당한 강골들임을 알 수 있다.


많은 공통점들이 있는데, 특히 국군보안사령관과 민정당 총재, 대통령, 작전차장보는 노태우가 전두환의 후임이라는 점이 특이사항이다.

5.3.2. 차이점[편집]

대통령이 된 이후의, 노태우의 정치 활동의 노선은 보수주의자인 전두환의 노선과는 거의 반대 성향이었다. 대표적인 진보 인사인 손호철 서강대 교수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진보적인 경제정책을 추진했던 대통령은 노태우 대통령이었다고 이야기했을 정도. 토지 개혁이나 북방 정책 등 또한 전임자와의 대표적인 정책상의 차이점으로 꼽힌다. 특히 토지공개념에 중점을 둔 토지 개혁과 그를 바탕으로 한 경제 민주화는 당시 야당 일각에서도 너무 앞서나간다는 우려를 표할 정도로 진보적인 경제정책이었다.

전두환은 국회의원을 한 적이 없고 국회의원에 출마한 적도 없지만 노태우는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전두환은 장관을 한 적이 없다. 반면 노태우는 전두환 정권 당시 정무제2장관, 체육부장관, 내무부장관을 역임했다.


육사 시절 전두환은 공부를 아주 못했으나[19] 노태우는 상당히 우수한 생도였다. 그러나 전두환은 특유의 리더십 덕분에 육사 11기의 리더로 노태우보다 앞서 갔다.

전두환은 직접 선거로 대통령이 된 적이 없고 일명 '체육관 선거'로 불리는 간접 선거로 2번 당선된 반면, 노태우는 6.29 선언 이후 도입된 직접 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관련 부서 및 일부 측근들과 함께 비밀리에 북한과의 정상 회담을 추진하려다 여권 관계자들의 반대에 부딪혀 실패한 전두환 정부와 달리, 노태우 정부는 공개적으로 남북이 평화 통일을 지향한다는 원칙을 담은 남북기본합의서를 작성, 강영훈 국무총리의 서명을 넣었으며, 한발 더 나아가 구 공산권 동유럽 국가들과 수교를 맺는 북방정책을 추진해 성공을 거두었다. 이 과정에서 소련에 14억 7천만 달러 규모의 차관을[20] 무기한으로 제공해 당시 큰 파장이 일었지만, 90년대 ~ 현재까지 소련을 계승한 러시아가 우리나라의 남북 정책에 대해 직접적으로 강한 태클을 걸지 않았던 건, 이 14억 7천만불이 보이지 않는 끈으로 작용한 것이라 보는 의견도 있다.

전두환은 와이프부터 해서 동생에 아들에 자국 혐오 논란을 일으킨 손녀딸도 있는 등 가족들이 문제를 많이 일으켰지만 노태우의 가족은 상대적으로 조용했다. 자녀들이 전부 이혼을 경험하기는 했지만 노소영의 이혼 소송은 남편이 워낙 유명인인 까닭에... 게다가 남편인 최태원 회장이 불륜을 저질렀으니 노소영은 오히려 피해자였다. 물론 노태우의 자녀들인 노소영과[21] 노재헌도 이혼을 하는 등 살아 생전에 물의를 일으킨 적은 있지만, 노소영의 경우는 이슈가 큰 부친의 구설수에 조용히 묻혔으며, 노재헌 역시 가정사 문제로 치부되어 잠시 화제가 된 것 외에 파장은 크지 않았다. 게다가 노재헌은 2019년에는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들에게 아버지를 대신해 사과하기까지 했다.

후손의 병역 문제도 대조된다. 전두환의 장남 전재국은 병역의무 대상자임에도 불구하고 석사장교로 대충 땜빵했지만 노태우의 외손녀 최민정은 병역의무 대상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해군 학사장교로 입대해서 3년간 군복무를 하고 중위로 만기 전역했다. 단 노재헌의 경우는 석사장교 출신이라 이에 대해서는 비판을 피할수 없다. 그렇지만 노태우의 장손으로서 노재헌의 아들인 노장호가 현역병으로 군복무를 마쳤다 미국에서 태어나서 계속 미국에서 자랐기 때문에 한국어 보다 영어가 더 익숙 해 훈련소에서 귀가 조치 됐지만 한국어 학원에서 한국어 교육과정 수강 후 재입대 해 육군병장으로 만기 전역 했다.

전두환은 2021년 현재 구순이 넘은 고령으로 퇴임한 지 거진 3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미디어에 간간히 이름이 언급되고 상당한 팬들도 존재한다. 그에 반해서 노태우는 김영삼 정권 때 구속 수감되었다 풀려난 이후 두문불출하며 근황이 거의 알려지지도 않았고 그나마 들린 소식이 건강 악화로 요양한다는 내용 정도였다. 그리고 전두환에 비하면 김영삼과 더불어 젊은 층에게서는 언급도 거의 되지 않는다.[22] 단지 젊은 층에게서 노무현이 노짱으로 불리면서 노태우가 그 반사 효과로 1대 노짱 혹은 원조 노짱으로 불리는 것 또는 노태우가 큰 노짱, 노무현이 작은 노짱으로 불리는 정도 뿐이다. 노태우와 노무현이 성씨가 같은 노(盧)씨인 것에서 비롯된 드립. 심지어는 노태우가 아직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는 사람들까지 있다.


성격도 차이가 심한데 전두환은 언제나 자기가 선봉으로 서서 가부장적인 웃어른같은 행동을 하며 자기가 직접 발로 뛰고 손으로 만져가며 사람들을 상대하는 스타일이지만 노태우는 그런 거 없이 차분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기 좋아하며 약간 히키코모리 기질도 있다.

전두환은 경제공부를 꽤나 즐겼고 대통령 재임기간 경제성적도 좋아 상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에 반해 노태우는 경제공부에 영 흥미를 붙이지 못했으나 외교분야에 대한 이해가 빨랐다고 한다.

전두환은 80대가 된 2010년대에도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90세가 다 된 2020년에도 꽤나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가 2021년부터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다발성 골수종을 앓기 시작한다. 그에 비해 노태우는 칠순을 갓 넘긴 2002년에 전립선암 투병을 시작으로 이후 소뇌위축증을 앓으며 현재까지 투병 중이다.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눈을 깜빡이는 것으로 겨우 의사표현만이 가능한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어 20년 가까이 외부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는 갈 날이 얼마 안남았다는 말까지 있다.

전두환과 달리 5.18 민주화운동의 가해 책임자 중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반성과 사죄를 표현하고 있다. 2020년 5월 18일에는 아들 노재헌이 현재 중환자라 직접 방문할 수 없는 노태우 대신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찾아 40년만에 13대 대통령 노태우 5.18 민주영령을 추모합니다. 라는 리본이 달린 조화를 헌화하였다. 5.18 민주화운동 학살 책임자 중 한명이 직접 제단에 헌화하고 사죄한 것은 이번이 '유일이자 처음'이다. 인터뷰에서 "피해자와 유가족들이 '이제 됐다'고 말씀하실 때까지 무릎을 꿇을 것이라고 한다. #






6월 항쟁 직후 6.29 선언을 발표하여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였고 "보통 사람들의 위대한 시대" 라는 슬로건을 내걸며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제1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제6공화국 출범 이래 직선제로 선출된 최초의 대통령이다.

대통령 퇴임 후 내란 혐의로 1995년 전두환과 함께 구속 기소되어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의 반란수괴 등에 관한 판결로 징역 17년을 선고받았다.[9] 헌정사상 첫 번째로 구속된 대통령이 되었으나 같은 해 12월에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사면되었다.


2002년 전립선암 수술 이후 건강악화로 인해 연희동 자택과 병원을 오가며 칩거생활을 해오고 있다. 희소병인 소뇌위축증을 앓고있으며 기본적인 거동을 하지 못해 휠체어를 타고 있다.[10] 대통령 취임식은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식 참석을 마지막으로 이후 20년 가까이 공식석상과 매스컴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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