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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보)서세원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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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에서 사업차 정착하고 있던 개그맨 서세원씨가 금일 오후 1시경 미래병원에서 링거 주사를 맞다가 심정지 상태인 것으로 알려짐.          

1979년 TBC 라디오를 통해 데뷔한 후 대부분의 활동은 MBC에서 했으며 MBC에서 활동하는 동안 영11, 청춘행진곡, 일요일 일요일 밤에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특히, 당시 대중들이 개그맨하면 떠올리는 "몸개그를 하거나 바보 흉내를 내면서 사람들을 웃기는 연예인"이라는 통념을 깨고 특유의 말발을 무기 삼아 말로 웃기는 개그맨의 길을 연 사람이다. MC로서도 유능해서 훗날의 유재석, 강호동, 신동엽과 같은 개그맨 출신 MC들이 단순히 진행자 역할에 그치지 않고 프로그램 전체를 기획하고 조율하는 주도적인 역할을 맡을 수 있는 토대가 되어준 전설적인 개그맨이다.

서세원은 1980년대 중반까지 동시대의 라이벌들인 김형곤, 주병진보다[7][8] 인기 면에서 언제나 우위에 있었다. 물론 1980년대 중반부터의 압도적인 원탑은 후배인 심형래였다. 그러나 심형래 직전까지 서세원이 정상급 코미디언들 사이에서도 최고였던 것은 틀림없다. 다만 80년대와 90년대에 넷 다 원탑은 아니었다. 이주일이 있었기 때문이다.[9]

청춘보감이라는 코너에서 서세원 최고의 유행어인 산 넘고 물 건너 바다 건너셔[10] [11]가 탄생했고 주병진이 본격적으로 뜨기 전 당대 젊은이들에게 가장 인기를 끌고 있던 예능 프로그램도 서세원이 진행하는 영11이었다. 또한 인기 연예인을 초빙해서 개그를 하는 <서세원의 스타데이트>를 진행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훗날 대한민국 토크쇼의 교두보를 마련하기도 했다.[12] 그 후 KBS 2TV에서 최양락이 네로 25시로 너무나 잘 나가자 MBC에서는 최양락의 대항마로 서세원을 다시 내세웠을 정도였다.[13] KBS는 콩트 중심의 상황극, MBC는 유행어를 민다는 방향성을 보였었다.

이후 서세원은 <서세원의 스타 데이트>를 진행한 경험을 밑바탕으로 1990년대 중후반부터 토크쇼 진행자로 변신, 2000년대 초반까지 KBS 2TV의 간판 프로그램인 '서세원쇼'로 흥행하게 된다. 주 코너는 '토크박스'로 출연 연예인들이 서로 센 이야기들을 해서 서세원이 등수를 매기는 방식. 다만, 이 프로그램의 컨셉[14]은 한국 방송의 고질적인 병폐인 일본 방송 베끼기다. 일본의 장수 인기 토크 프로그램 라이온의 고키겡요(ライオンのごきげんよう, 1991년부터 방송)의 코너 '주사위 토크'를 그대로 따라했다. #

그 외에 코미디 세상만사, '공포체험 돌아보지마'[15], 시사터치 코미디 파일 등의 KBS 코미디 프로그램[16]과 라디오 '가요산책'[17], '서세원의 좋은 세상 만들기'[18]의 진행자로 방송계에서 폭발적인 위세를 누리며 데뷔 20여년이 지난 1990년대 후반까지 김국진, 이경규 등의 탑레벨 개그맨 다음가는 1군~1.5군 정도의 위치를 꾸준히 지키고 있었다. 게다가 그 둘보다 선배였고[19] 이경규의 일밤 전성기 시절에도 서세원 역시 본인이 진행하는 프로그램들로 나름 큰 인기를 가지고 있었으니 이주일이 암으로 사망하고 심형래가 영화 제작 문제로 빠진 21세기에, 후술된 막장 짓거리들을 안 했더라면 서세원은 현재까지도 이경규보다 예능계에서 더 압도적인 권위를 가졌을 것이다. [20]

즉, 서세원은 신인 때부터 인기를 끄는 스타로 시작하여 정통 콩트 코미디가 유행할 때는 콩트로, 연예오락(지금의 예능)이 유행할 때는 그 진행자로, 시대흐름이 바뀌어 오는 것에 따라 발맞추어 모두 성공했던 최강 커리어의 희극인이었다. 그야말로 전성기가 아닌 적이 없을 정도.[21] 콩트, 토크쇼, 교양성 예능, 정통 예능까지 코미디언이 진출할 수 있는 분야는 모두 진출해서 성공했다고 보면 된다. 커리어 상으로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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