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살바도르 대통령 나이브 부켈레이야기 슈카월드
1981년생인 부켈레는 밀레니얼 세대 대통령이다.
그는 지난 2월 9일(현지시간) 무장한 군인과 경찰
수십 명을 거느리고 국회에 들어가 논란을 일으켰다.
국회에 군인이 들어간 것은 1992년 내전 종식 후 처음이었다.
“엘살바도르는 전후 시대의 페이지를 열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미래를 향해 출발할 것입니다.”
중미의 소국 엘살바도르의 나이브 부켈레 대통령(39)은 지난해 2월 대선에서 승리한 후 이렇게 말했다. 기업인 출신으로 수도 산살바도르 시장을 지낸 부켈레는 국민통합대연맹(GANA)의 대선후보로 출마해 54% 이상을 득표했다.
부켈레의 승리는 오랜 군부독재와 내전의 결과인 30년 양당체제의 종식을 의미했다. 1821년 스페인에서 독립한 엘살바도르는 1931년 중도좌파 성향 정부가 군사쿠데타로 전복되고 군사정부의 철권통지가 이어졌다. 1980~1992년에는 군사정권과 이에 저항하는 좌파 게릴라 사이에 내전이 벌어져 약 7만 명이 죽고, 인구의 5분의 1에 가까운 100만 명이 난민이 됐다. 1992년 유엔의 중재로 양측의 평화협상이 맺어지면서 비로소 내전이 끝났으나 이후에도 좌파인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FMLN)과 우파인 민족공화연맹(ARENA)이 30년간 집권하면서 부패 문제가 심화했다. 대통령 3명이 부패 혐의로 구속됐다.
나이브 부켈레 엘살바도르 대통령이 지난 2월 9일(현지시간) 국회 밖에서 지지자들에게 연설을 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개혁가인가 독재자인가
내전 기간 중 무기가 보급되면서 조직범죄도 기승을 부렸다. 엘살바도르는 2015년 인구 10만 명당 104명이 살해당해 세계에서 가장 살인율이 높은 국가로 기록됐다. 엘살바도르 국민은 기존의 좌·우 정당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아웃사이더’ 부켈레에게 표를 몰아줬다. 구시대와의 결별과 새로운 변화를 위해 모험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1981년생인 부켈레는 밀레니얼 세대 대통령이다. 선거 기간 내내 청바지와 가죽 재킷을 입고 지지자들과 ‘셀카’를 찍는 자유로운 행동으로 ‘힙스터’ 정치인으로 불렸다. 대선 승리 연설도 청바지와 가죽 재킷을 입고 했다. 밀레니얼 세대답게 소셜미디어(SNS) 활용에도 능하다. 그의 트위터 팔로워는 190만 명에 이른다. 지난해 9월에는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총회에서 연설하면서 스마트폰을 꺼내 ‘셀카’를 찍는 행동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부켈레 대통령은 조직범죄와의 싸움을 명분으로 과거 독재 정치인들을 연상케 하는 행보를 보여 비판받고 있다. 부켈레 대통령이 높은 지지율을 바탕으로 민주주의 원칙을 무시하면서 포퓰리스트 독재자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코노미스트>는 “라틴 아메리카의 첫 밀레니얼 독재자가 되는 길을 가고 있다”고까지 평가했다.
부켈레 대통령은 지난 2월 9일(현지시간) 무장한 군인과 경찰 수십 명을 거느리고 국회에 들어가 논란을 일으켰다. 국회에 군인이 들어간 것은 1992년 내전 종식 후 처음이었다. 부켈레 대통령은 중남미 최고의 범죄 국가로 불리는 엘살바도르의 범죄 해결을 위해 군대와 경찰의 장비를 강화해야 한다면서 1억900만 달러(약 1294억원)의 차입 계획을 승인해 달라고 국회에 요구해왔다. 그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 국회에 임시국회를 열어 이 문제를 처리하라고 요구했으나 야당 의원들의 반대로 국회가 열리지 않았다. 부켈레 대통령의 소속 정당인 GANA는 의회 84석 가운데 11석을 차지한 소수 정당이다. 이에 부켈레 대통령이 무장 군경을 동원해 위력을 행사한 것이다. 야당 의원들은 “쿠데타 시도”라고 비난했다.
나이브 부켈레 엘살바도르 대통령이 지난해 9월 유엔총회에서 연설 도중 스마트폰을 꺼내 셀카를 찍고 있다. 부켈레 대통령 트위터
당시 국회 밖에서는 대통령 지지자 수천 명이 모여 의회를 압박했다. 부켈레 대통령은 국회 진입에 앞서 “국민이 반란을 일으킬 권리가 헌법으로 보장돼 있다”, “거리로 나와 국회를 압박하자”는 메시지를 보냈는데, 이에 호응한 지지자들이 모인 것이다. 의회를 무시하면서 지지자들을 정치적으로 동원하는 것은 권위주의적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모습이다.
코로나19 대응을 두고도 논란이 빚어졌다. 부켈레 대통령은 지난 3월 21일 전국 봉쇄령을 내렸다. 당시 엘살바도르의 코로나19 누적 확진자는 3명에 불과했다.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신속하게 나선 것이지만, 인권을 침해한 과잉 대응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경찰은 이동금지령을 위반한 2000명을 체포, 30일간 감금해 위법성 논란이 불거졌다. 대법원은 적법한 근거 없이 시민을 감금해서는 안 된다고 판결했으나 부켈레 대통령은 이를 무시했다. 그는 트위터에 “(대법관) 5명이 수백만 엘살바도르인의 죽음을 결정할 수 없다”고 썼다.
엘살바도르 수도 산살바도르의 한 교도소에서 속옷만 입은 수감자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대통령실이 지난달 25일(현지시간) 공개한 사진이다. AP연합뉴스
군대와 경찰에 의존하는 대통령
엘살바도르 대통령실은 지난 4월 25일 갱단 조직원들이 교도소에서 보안 검열을 받는 모습이 담긴 여러 장의 사진을 공개했다. 속옷만 입은 수용자들 수백 명이 앞뒤로 밀착한 상태에서 바닥에 앉아 있는 이 사진은 적나라한 이미지로 전 세계에 충격을 줬다.
엘살바도르는 지난 3월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한 봉쇄령이 내려진 후 강력범죄가 줄어드는 추세였다. 3월에는 사상 처음으로 4일 연속으로 살인 사건이 1건도 일어나지 않기도 했다. 그러나 4월 24~26일 사흘 동안에만 53건의 살인이 발생해 비상이 걸렸다. 이에 부켈레 대통령은 필요한 경우 군·경이 무력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24명이 피살돼 부켈레 대통령 취임 이후 가장 많은 살인이 일어난 4월 24일에는 폭력조직원들이 수감된 교도소에 24시간 봉쇄령을 내렸다. 조직 우두머리들이 옥중에서 범죄를 지시한 것으로 보고 접촉을 차단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경쟁하는 폭력조직원들을 같은 감방에 수용하기도 했다.
이는 대통령이 되기 전 산살바도르 시장 시절의 접근과는 확연히 달라진 태도다. 부켈레 이전의 시장들은 조직범죄를 소탕하겠다고 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부켈레는 조직범죄와 싸우겠지만 힘으로 억누르는 대신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겠다면서 공동체를 복원해 범죄의 근본적인 원인을 바꾼다는 접근을 취했다. 산살바도르의 인권운동가 셀리아 메드라노는 <뉴욕타임스>에 “과거에 그를 칭찬하고 신뢰했던 이들은 이 나라에 돌이킬 수 없는 해를 끼칠 수 있는 권위적이고, 무책임하고, 미성숙한 대통령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산살바도르 교구의 루이스 코토 신부는 “대통령이 군대와 경찰에 의존하고 있다”면서 “엘살바도르가 내전 시기로 퇴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논란에도 불구하고 부켈레 대통령의 공격적 행보에는 당분간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을 전망이다. 내년 2월 예정된 총선에서 여당은 80%에 이르는 대통령 지지율을 바탕으로 제1당이 될 것으로 보인다.